어느 남자 이야기

어느 남자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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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인한 11월이 지나고 어느새 가을도 숨이 한껏 짧아졌다고 그는 생각했다. 아침 저녁으로 점점 커지는 일교차 속에서 성큼 성큼 겨울로 향하는 오늘이지만 그의 마음 속에는 아직도 10년도 훨씬 지난 그 시리도록 차가운 겨울 바람이 불고 있었다. 성가실 정도로 길게 난 하이웨이를 따라 차 사이드 미러를 따라 오는 달에게 그는 이제 그만 그만이라고 속삭여 본다.

차에서 내리려던 그는 문득 그녀를 만나지 않았었더라면 하고 생각을 해본다. 시간을 돌리고 돌리고 기억을 되감고 되감아 그는 그가 그녀을 처음 보았던 캠퍼스, 그 언덕으로 되돌아 가본다. 커다란 두눈에 껑충한 바지를 입고 있던 그녀에게서 그는 순수하다는, 때묻지 않았다는 느낌을 가졌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고 그녀의 주위를 서성거리며 그는 그녀에게서 사랑을 찾게 되었다. 계획되지 않았던 어설픈 첫키스의 기억처럼 그녀를 향한 그의 마음은 날이 가면서 더욱 깊어져만 갔었다. 하지만 그의 무의식 중에는 언제나 헤어짐에 대한 그늘이 져 있었다.

준비하지 않았던 이별은 아니었지만, 이별은 거짓말처럼 다가왔고 그는 낯선 하늘 아래서 불면의 밤을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난 뒤, 그녀의 결혼 소식이 그에게 준 선물은 체념이었고 죽음보다도 깊은 잠이었다. 부스럭 거리는 바람 소리에도 꿈처럼 그녀가 오리라는 희망을 숨겨놓았던 그에게서 그녀의 결혼은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모르고 있었다. 그녀가 그에게서 정녕 무엇이었는지.

누구에게도 그는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녀를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그리고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던 자신의 무능력에 그는 늘 숨을 곳을 찾고 싶어했다. 누군가는 말했었다. 다른 사람을 심어 보라고 새로운 사랑을 시작해 보라고. 하지만 그녀가 아닌 그 누구도 그에게 사랑이 될 수는 없었다.

휴~ 한숨을 크게 몰아쉬던 그는 주섬 주섬 가방을 뒤져 열쇠를 꺼내 들었다. 텅빈 집 안에는 어떤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버리듯 소파 위에 핸드폰과 열쇠를 던져 놓은 그는 무너지듯 거실 바닥에 앉았다. 울고 싶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냥 펑펑 울면 조금은 마음이 편해 지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퀭하니 번득이는 그의 눈엔 가느다란 실핏줄만이 가득 서려 있었다.

그에게서 그녀는 감옥이라고 그는 단정지었다. 그녀를 사랑했던 죄, 그녀를 지키지 못한 죄, 그녀를 잊지 못하는 죄, 그녀를 울게 만든 죄, 그리고 이렇게 그녀 없이도 태연한 척 살아가는 가증스러운 그의 모습은 천년이고 만년이고 그녀라는 감옥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그는 믿는다.

그리고 그는 믿는다. 우습게도 그녀를 만난 것이 그에겐 가장 큰 인생의 잭팟이었다고. 그녀를 만나지 않았었더라면 이라는 생각이 그에겐 역시 태어나지 않았었더라면 이라는 가정과 같음을 그는 알고 있기에. 그녀 없이 숨쉬는 일조차 버거운 그이기에 더더욱.

익숙해진 어둠을 빛 삼아 그는 불을 켠다. 그리고 뱀이 허물 벗듯, 휙 휙 팽개치듯 옷을 벗고 쏟아지는 물 속에 그의 몸을 맡긴다.  얼마고 그렇게 고개를 숙이고 있던 그는 시선을 들어 떨어지는 물 방울을 응시하다 잠꼬대 처럼 한마디를 던진다.

"잘 지내지? 많이 보고 싶어..."

그의 얼굴을 따라 쏟아지는 물줄기가 눈물인지 아님 샤워기의 물인지 그는 확신하지 못한다.

이 게시물에 달린 코멘트 1
컴퓨터사랑 2009.05.08 13:12  
좋은 글 잘 보고 갑니다 떠도는 섬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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