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울하기 그지없는 동기의 기막힌 사연
오늘 털어놓는 이 사연은 지금으로부터 오년전 2008년에 벌어진 일이다. 아들을 낳기 전날까지 죽기살기로 일을 했던 나는 급격하게 무리해진 몸상태로 인해 서울의 국립의료원에 종합검진차 올라왔다가 꽤 오랜만에동기들과 만나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오년전 나는 하나원을 수료함과 동시에 아빠가 계신 경상북도 시골로 자동적으로 내려가다보니 함께 사선을 넘어왔던 대부분의 동기들(나를 제외한 다른 친구들은 거의 수도권에 머물러 살았다.)의 소식은 근근히 인편을 통해서만 들으며 지내야 하였다.
사실태어난 곳을 좀처럼 벗어나기 힘든 북한과 달리 이동의 자유가 엄연히 존재하고 또 통행증발급이 필요없는 남한이였지만 서로들 주어진 환경에서 열심히 정착생활을 진행하느라 얼굴을 볼 틈도 변변치 않았다. (남한정착 십년 되도록 한번도 못만난 동기도 있다.) 어쨋든 너 나없이 분주하게 살아가다가 불현듯 듣게 된 어느 동기의 소식은 나에게 가히 충격적인 느낌을 던져주기에 충분한 내용이였다.
“@@언니, @@이가 지금 교도소에 가있어!”
불과 몇달전에 한 동기의 자살소식을 전해듣고 그 충격이 미처 가시지 않았던 터인지라 나는 화들짝 놀랐고 누구보다 성실한 이미지로 기억되는 @@이가 교도소에서 현재 복역중이라는 사실이 놀라웠다.
“아니 왜? 무슨 일인데?”
나의 놀라움이 섞인 질문에 동기생친구는 여차저차 사연을 설명해주기에 분주했다. 대충 내용을 들어보니 참으로 황당하고 기가 막힌 사연이였다. 서울의 노원구나 양천구, 강서구 같은 곳에는 국내 정착 새터민(탈북자)들이 꽤 많이 살고 있다. 한 동네에 제법 많이 모여서 살다보니 대충 서로 서로 얼굴을 알고 지내나 보다.
그런데 여기에 또 한층 깊게 파고들어가야 하는 문제가 있었다. 거의 대부분의 새터민(탈북자)들은 두만강을 넘어 중국을 경유해야만 남한으로 입국할수 있다. 여자들 같은 경우는 시도 때도 없는 북송의 공포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마음에도 없는 중국사람과 결혼을 해야 하는 경우가 허다한데 문제는 그렇게 탈북여들과 결혼한 중국인 배우자에게서 사람다운 대접을 받는 경우가 그다지 많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게 어찌 어찌 참고 지내면서 아이도 낳고 살다가 다시 한국행을 하게 되고 운이 좋아 성공하게 되면 다시 남편과의 국제결혼을 통해 다시 남한에서 가정을 이루고 사는 경우도 다반사이다. 어차피 아이가 있으니 애의 장래를위해서라도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여기에서 시작된다. 과거 중국에서 살 당시에는 온갖 불합리한 상황들도 꾸역꾸역 참고 순종하던 탈북여성들이 입국한 이후 한국에서 새로운 삶을 찾아가면서부터는 절대로 순순히 과거처럼 무조건적으로 참고만 있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아내의 변화에 대해 당혹해하고 또 견디지 못하는 것은 과거 중국에서 무소불위의 행세를 하며 살던 그들의 중국인남편들이다. 아내의 결혼초청으로 운좋게 훌쩍 한국에 오긴 했으나 와보니 생각처럼 그렇게 돈을 쓸어담는 별천지가 아니였을뿐더러 아내도 예전처럼 순종적이거나 고분고분하지 않으니 여러 가지로 충돌하는 부분이 많기도 하다.
(이미 인천시 논현동에선 언론에 발표된 것만 조선족신랑이 탈북여성아내를 흉기로 찔러죽인 사건이두건인가? 발생했다.)
두서없이 나열하긴 했으나 동기가 교도소로 가게 된 원인도 이러한 사연들과 결코 무관하지 않았음에야...
설명하기 좋게 교도소에 간 친구를 간편하게 A라고 부르겠다.
사건의 발단은 이렇다. A가 보람찬 하루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동네 어귀에서 웬 여자가 자지러진 비명을 지르며 남자 네명에게 둘러싸여서 백주 대낮에 맞고 있더라는 것이다. 자세히 살펴보니 한 동네에 사는 얼굴만 아는 탈북여성이였다. 그리고 그 여성에게 둘러붙어 때리고 있는 남자들은 여자의 남편(중국조선족)과 그의 친구들이였다.
평상시에도 아내에게 주먹질을 자주 해대는 비상식적인 그 조선족신랑의 악행은 동네에도 소문이 자자했다고 한다. 아무튼 상황이 대충 파악이 된 A가 분노를 참지 못해 그예 주먹을 날렸다고 한다. 한국에 17대 1이라는 유머스런 전설이 간간히 떠돌긴 하드라만 A는 혼자서 네명을 상대해 거뜬하게 때려눕혔다고 한다. 그 패거리중 한 사람이 최고 전치 8주가 나왔고 나머지도 다 그 이하였다고 한다. 아무튼 A의 행동은 누가 봐도 참으로 찬사를 보낼 만큼 정의로운 행동이였다. (폭행을 정당화 하려는것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A는 이날의 사건이 자신의 앞날에 드리우게 될 검은 구름이였고, 곧 두고 두고 자신의 정의로운 행동을 후회하는 고통스런 부메랑으로 다가오게 될줄은 미처 몰랐던 것이다. 힘없고 연약한 아내를 마음껏 때리던 중에 갑자기 뛰어든 웬 탈북남자때문에 얻어맞고 분을 참지 못한 중국인남편은 폭행죄로 A를 고소했고 그날의 사건은 결국 법정까지 가게 되었다.
누가 봐도 참으로 어이없는 이 사건에서 과연 결론이 어떻게 나왔을까? 참으로 어처구니 없게도 A는 이 폭행사건으로 인해 3년이라는 중형을 언도받게 된다.
그렇다면 왜 이런 황당한 결과가 나오게 되었을까? 사연인즉은 다음과 같았다. 백주대낮에 마누라를 때리던 그 조선족신랑은 조선족들의 인권을 옹호하기로 유명한 어느교회에 도움을 청했고 그 교회에서는 전후사연과는 무관하게폭행사건에 가담된 조선족들을 열과 성을 다해 변호를 했다고 한다. 소위 조선족동포들의 인권을 지켜준다는 명분하에 모든 재판과정에서 조선족들의 무죄에 대해서 있는 힘껏 변호를 했고 결과 정의를 위해 기꺼이 한몸 날렸던 A에게는 3년이라는 중형이 언도되었다고 한다.
사태가 이렇게 진행될 동안 A의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그 많은 탈북자정착지원단체니, 민주화니 인권이니 하는 시민단체들조차 단 한 곳도 A가 처한 어려움을 위해 나서주지 않았다고 한다. 뒤미처 동기에게서 이 기막힌 사연을 전해 듣고 나는 정말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도대체 이것이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어떻게 법치주의국가에서 이런 일이 버젓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솔찍한 말로 그 사건이 벌어질 당시를 내가 알았더라면 백방으로 모든 노력을 다했을터인데... 아쉬움이 짙게 남았었다. 아무튼 일은 이미 벌어졌으니 나는 그후 급히 시간을 내어 A가 당시 복역중이던 김천교도소로 찾아갔다. 물론 나하고는 함께 국경을 넘어왔다는 인연만이 달랑 있을뿐이였지만 나는 혹 A가 자유의 꿈을 안고 찾아온 남한사회에서 법의 잣대라는 이름하에 행해지는 불합리한 모순에 대해씁쓸함을 안은 채 결코 해서는 안될 극단적인 선택을 할까봐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나원을 수료하고 오년만의 재회였던가? 다행히 A는 내 얼굴을 기억하고 있어서 다행스러웠다.
어떡하나 살아남아야 한다고, 앞으로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더 많으니 꼭 힘내서 잘 지내다 나오라고 격려해주니 오히려 담담해하고 기뻐한다.
자기도 이번 일을 통해서 인생공부 참많이 했다면서... 결론은 곁에서 곧 숨이 넘어가는 사람이 있더라 할지라도 두 번 다시는 남의 일에 나서지 않겠다고 한다. 뭐 A의 입장에서야 지극히 당연한 결론이 아닐까 싶다. 영치금 십만원을 넣어주고 먹고 싶은것 사먹으면서 잘 지내라고 신신당부를 해주며 돌아섰던 것이 엊그제같다. 여기서 A의 인간성에 대한 작은 일화를 하나 공개해보려고 한다. 교도소로 갈 당시 A에게는 미래를 약속한 처녀가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어느날 갑자기 이렇게 운수사납게 일이 꼬였는데...
A가 만기 복역하는 삼년동안을 이 아가씨가 식당일 하면서 꼬바기 옥바라지를 했다고 한다.
지금같은 세상에 감옥간 남친(남편도 아니고)을 뒷바라지 하는 여자가 과연 몇명이나 될까?
평소 A의 인간성을 충분히 엿볼수 있는 대목이 아닐수 없겠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A는 만기출소를 했고 동기들에게 물어 물어 나를 찾아왔다. (당시 나는 이미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었다.) 그때 면회 와주어서 참으로 고마웠고 힘이 되었다면서... 앞으로 자기가 그 신세를 꼭 갚겠다면서...동네 한켠에 자리잡은 구석진 포장마차에서 조촐한 안주에 맥주 두병 나눠 마시며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꽤 많이 나누었다.
나는 잊지 않고 기억해주고 이렇게 찾아봐 인사해주어서 더 고맙다고, 열심히 살아남아서 우리 2세들을 앞세워반드시 고향에 돌아가자고 담담히 이야기 해주었었다.
오늘날 국내에는 탈북자정착지원관련단체가 무려 80여개나 존재한다고 한다. 하지만 이렇게 A처럼 누가 봐도 황당하고 어이없는 일을 당했을 때 도움을 줄 수도, 구할 수도 없는 단체라면 과연 그 존재여부에 대해 의문을 가지지 않을수 없다.
왜서 다문화 관련해서는 온갖 인권단체니, 시민단체니, 심지어 교회에서까지 나서서 울타리가 되어주는데 정작 새터민(탈북자)들에게는 아무도 손을 내어밀지도, 잡아주지도 않는 것일까?
나는 도대체 왜 이런 기현상이 발생하는지 실로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새터민(탈북자)들을 가리켜 "먼저 온 미래"니, "통일의 밑거름"이니, "통일의 가교"니 얼마나 번지르르 말들은 잘 하는가 말이다.
도대체 무슨 이유일까?
이것에 대한 의문점을 풀어가는 것이 나의 또 하나의 숙제로 남겨져 있다.
- 2012년 8월 5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