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착소개) 기적을 이루는 사람
[강원도 깊은 계곡에서 고사리 받을 일구어 한국사회에서의 정착의 길을 성공적으로 다지고 있는 김승철씨를 만났다. 그동안 겪은 일들을 담담히 전해준 김승철씨의 이야기는 다른 탈북자정착에 힘과 용기가 되기에 여기에 정리했다.]
1. 용기가 성공의 지름길을 마련하다
강원도 횡성군 마옥리 계곡에는 무성하게 자란 고사리 밭이 있다, 3000여 평에 달하는 이 고사리 밭은 그 수익을 얼핏 계산해도 만만찮은 액수로 보는 사람을 부럽게 만든다. 그런데 놀랍게도 밭주인은 본토민이 아닌 북에서 들어 온 사람이란다.
2003년 입국하여 올해 7년째 대한민국 밥을 먹는다며 넉넉한 웃음을 짓는 김승철씨, 벌써 50대 중반의 나이지만 땀에 젖은 얼굴엔 꿈에 부푼 젊음이 넘쳐난다. 이곳만이 아니라 충청북도 청원에도 2000여 평, 강원도 원주에 3000평, 횡성읍 길풍리에 2000평의 고사리 밭이 더 있단다.
본인의 말에 의하면 벌써 밭 작황을 보고 내년도 주문이 쇄도한다고 한다, 그만큼 국산 고사리는 없어서 못 판다는 말이다. 주문 값은 키로 당 만원, 평당 수확량이 7-12kg이라 하니 벌써부터 돈방석에 앉은 김승철씨 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물론 밭 면적과 작황만을 보고 미리 김칫국물부터 마실 것까지는 없지만 앞일을 계획하며 희망에 부푼 그의 마음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어떻게 고사리 키울 생각을 했느냐는 질문에 그는 슬며시 웃음 지으며 입을 열었다.
“한국에 첫 발을 디디는 순간부터 무엇을 하며 살겠냐는 생각에 밤잠을 설친 적이 많습니다. 생각을 정리할 새도 없이 공장으로 그리고 공사판까지 많이 부딪쳐 보았지만 50대에 접어든 내가 할 만한 것은 별로 없더군요. 이 사회는 풍요롭긴 하지만 나같이 뾰족한 능력이 없는 자에겐 차디찬 세상이기도 하죠, 나중엔 몇 년 모아둔 돈으로 노래방을 시작했답니다. 하지만 그것 역시 텃세가 심하더라고요. 뭐 바깥에서 굴러들어 온 놈이 제법 가게까지 차린게 샘나는지 괜히 술 먹고 들어와서는 시비 걸고 기물을 들부수며 난리를 치더라고요, 그래서 멱살을 잡고 내치고 들치고, 허허 몇 번 파출소 놀음까지 벌였는데 그러고 나니 맛이 싹 가더라고요.
일 년 만에 적자를 안고 문을 닫았지요. 그렇다고 당장 오라는 데도 없어 갈팡질팡 했죠, 사실 아직 건장한데 아침에 일어나면 어디 갈 데도 없고 돈 쓸 일은 많은데 하루 종일 빈둥거리는 것만큼 서글픈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강원도 춘천에 올라가 건강원 가게도 한 번 맡아 보았습니다만 그것 역시 나 같은 탈북자가 할 일이 아니었어요. 문제는 무엇을 차리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다음이거든요. 이미 밀어 넣은 돈이 있어 가슴 조이고 있을 때 두 눈이 번쩍 뜨이는 소식이 들렸습니다.”
그건 바로 빈곤층 주민을 농촌에 정착시켜 준다는 소식이었다. NK지식인연대로부터 취업상담이 있으니 사무실로 와 달라는 연락을 받고 그는 한달음에 공덕동으로 달려갔다.
북한에서 철학교수로 있던 연대부대표 현인애 선생과 장시간 면담 끝에 그는 드디어 결심을 내렸다고 한다.
바로 이것이다, 내가 이 땅에서 작은 날개나마 펼칠 수 있는 곳은 도시가 아닌 농촌이다. 쉽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결심을 하니 앞이 환해졌다.
그는 다음날 해당문건을 접수시키고 춘천으로 달려가 가게를 정리했다. 하늘이 돕는지 가게를 부동산에 내자마자 팔렸다. 얼마 안 있어 전화가 울렸다.
경기도 시흥에 있는 한국농촌진흥연구소에서 온 농촌정착에 필요한 실무 강습을 알리는 전화였다. 그의 가슴은 흥분으로 요동쳤다. 모든 것이 일사천리로 나가자 그는 신이 나서 열심히 공부했고 그때까지도 미심쩍어 저울질 하던 농촌정착의 결심을 굳혔다.
“전혀 다른 생활을 한다는 건 말처럼 그렇게 쉽지 않았어요, 그런데 지내보니 무엇이든 마음먹기에 달렸고 일단 결정하면 사활을 거는 것이 중요했어요, 여기서 흔들리면 내 생명은 끝장이다, 북한과 달리 이곳에서는 무슨 일을 하던 열과 성을 바치면 반드시 결과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마음은 마냥 부풀었고 힘은 들었지만 하는 일마다 성수가 났어요.”
사실 밭을 다루는 일은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다. 그는 북한에서 농사짓던 사람도 아니다. 젊어서는 수도건설 돌격대에서 일했고 그 이후에는 함흥에서 채소 도매사업을 했다. 러시아 벌목에도 갔었지만 농사를 전업으로 해본 일은 없다. 그런 그가 농사에 다소나마 재미를 본 적이 있었는데, ‘고난의 행군’ 시절 반룡산 자락에 뙈기밭을 일궈본 거였다. 배급이 끊기자 식구를 살리기 위해 비지땀을 흘리며 옥수수 농사를 지었는데, 하루가 다르게 크는 작물을 보는 재미가 그렇게 흐뭇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주린 배를 움켜쥐고 땅을 일구던 그때가 마치 그림처럼 안겨들었다. 쇠스랑이로 땅을 일궈 밭을 만들면서 그것으로 식구 먹일 생각만 하던 그때와는 달리, 이곳에서 농사는 말 그대로 사업이고 성공과 실패를 가르는 시험장이었다. 일단 시작한 이상 패자가 되기는 싫었다.
임대한 밭에 무엇을 심을까 고민을 많이 했다. 시장조사를 하고 관계자를 만나고 연구원의 조언도 듣고 하면서 심사숙고한 끝에 그가 내린 결론은 바로 고사리였다. 고사리, 지금은 무성하게 자라 내년부터는 본격적으로 수확을 할 수 있어 이웃하고 사는 농민들도 혀를 찬단다. 어떻게 북에서 온 사람이 고사리 농사를 할 생각을 했냐는 것이다. 자기들은 해마다 자연고사리를 뜯어 말리면서도 그걸 밭에 옮겨 재배할 생각은 못했다는 거였다.
처음 밭에 고사리 뿌리를 옮겨 심을 때 모두 그걸 보고 비웃었다고 한다. 뭐든 처음엔 주저하며 남이 하면 머리를 기웃거린다. 그러면서 어디 좀 두고 보자는 상반심리가 있다. 그러다보면 세월은 흐르고 그만큼 한 수 뒤로 밀리는 것이 오늘의 경쟁사회 모습이다. 세월을 잡는 것은 두려움 없이 도전하는 용기였다.
2. 고마운 분들
만평의 밭은 작은 것이 아니다. 어찌 보면 김승철씨는 욕심도 크다. 처음엔 누구든 시험 삼아 작게 시작하는 것이 상례지만 그는 생각부터 달랐다. 해보다 안 되면 그만둔다는 생각은 처음부터 그의 머리에 없었다.
그는 이 사업에 사활을 걸었던 것이다.
사실 60을 바라보는 나이에 언제 우물쭈물할 시간이 없었다고 한다. 반드시 된다는 확신을 가졌기에 오늘의 그를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확신 하나만으로 되는 일은 없다. 만평 고사리 밭 조성이 혼자 힘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하지만 일단 일을 벌이니 주위에서 관심과 도움의 손길이 찾아들었다.
“너무나 생각 밖이었어요, 경험도 없는 내가 머릿속에 있는 그림을 그려 낼 수 있을까 하고 고심할 때 제게 힘을 주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한국농촌진흥 연구소 김일주 회장님은 저를 대견하게 생각했는지 적극적으로 후원해 주셨습니다. 농사관련 공부도 시켜주셨고 필요한 자금도 주저 말고 요청하라 했습니다. 횡성군청 농업정책과에서는 없던 예산을 새로 만들면서까지 제 고사리 밭 조성사업을 밀어 주었습니다. 그런 지원이 없었다면 전 벌써 주저앉았을지도 모릅니다.”
고맙다는 말 한마디로 대치하기에는 너무나 벅차다. 내년부터 김승철씨는 아무리 적게 잡아도 억대 수익을 낼 수 있게 되었다. 탈북한 사람에게 이건 기적이 아닐 수 없다. 수익의 규모가 아니라 단 시일 안에 이런 일을 성사시킨 그의 배포와 수완에 기적의 진수가 있는 것이다.
파랗게 자란 고사리 밭을 보면서 수입규모를 어림잡고 있는 나에게 그가 전화를 건네주었다.
충북 청원의 2000평 고사리 밭을 임시 관리해 주는 농민이었다. 그 농민은 굼벵이 키우기로 유명한 사람이란다, 그런데 어느 날 자기 밭 주변에서 무럭무럭 자라는 고사리를 보고 너무 희한해 그 대신 관리를 맡았다는 것이다.
직접 관리하면서 키우기 묘미를 익혀 내년부터는 본격 사업에 들어가겠다는 사람이다. 고사리가 과연 경제성이 있냐는 나의 물음에 그는 크게 웃으며 말했다.
“없다면 한생 굼벵이 키우며 살아 온 내가 욕심을 내겠습니까? 두말하면 잔소리죠.”
“고사리 판매현황은 어떻습니까?”
“뭐 없어서 못 팔죠, 대체로 보면 국산은 공급이 충분치 못해 내가 먹기 위해 사는 거구요, 중국산, 북한산은 음식점이나 식품공장에서 도매합니다. 값 차이를 보면 외국산에 비해 2배정도로 보면 되는데 외국산은 국산보다 그 질이 많이 떨어져요, 사실 건강식품인 고사리는 자기가 먹으려고 외국산 사려는 사람은 없습니다. 내가 김승철씨를 알게 된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체험 겸 몇 달간 재배과정을 지켜봤는데 놀라운 것이 있습니다.”
“그게 뭔데요?”
“고사리는 불편한 돌밭에서도 아주 잘 자란다는 것이죠, 그리고 여기 산속엔 고라니, 멧돼지, 노루 등 산짐승에 의한 작물피해가 많은데 고사리는 전혀 없다는 겁니다. 농약과 비료도 필요 없어 완전 친환경적이고요, 그리고 다년생 식물이어서 한 번 심으면 다음부터는 수확만 하면 되지요. 말하자면 한 번만 고생하면 된다는 말입니다. 이게 꿩 먹고 알 먹고 둥지 털어 불 때는 것 아닙니까?”
“듣고 보니 그렇군요. 그러고 보면 김승철씨도 선생님을 만난 것이 행운인 것 같습니다. 서로 의지가 되니까요.”
“그럴 수 있겠군요. 김승철씨는 정말 좋은 분입니다, 북에서 왔다고 하는데 만나는 순간부터 친형 같은 느낌을 받았지요. 이분은 지금 무려 10여만 평의 땅을 준비해 사업을 확장할 계획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탈북자들을 위해 그 땅에 정착하게끔 돕겠다는 것입니다. 분명 보통 분은 아닙니다.”
나는 김승철씨를 돌아보았다. 그게 사실이냐고 묻자 그는 고개를 끄떡인다. 수익이 확실한데 나 혼자서 독차지 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은 이상 본인 역시 다른 사람과 함께 그 결실을 나누고 싶다고 한다.
“기자님도 생각이 있으면 어느 때든 오십시오, 오천 평정도 가꿔 보노라면 분명 뭔가 보일 겁니다. 산이 많은 대한민국 영토엔 쉬는 땅이 너무 많습니다. 고사리뿐이 아니라 더덕, 황기, 인삼 등 험한 땅에 심을 작물도 많고요. 땅을 놀게 하면 안 되지요, 나는 많은 사람이 이 사업에 관심을 가졌으면 합니다. 조국을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버려져 있는 산과 들에 천연작물이 넘쳐나도록 심어 가꾸는 것도 애국이 아니겠습니까? 부자 되는 길이 그리 멀리 있는 것도 아닙니다.”
나는 잔잔한 감동을 느꼈다. 역시 인간은 욕심으로 뭔가 이루는 존재가 아니다. 일을 사랑하고 뜻을 세워 자기를 바치는 곳에 풍성한 열매가 있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김승철씨는 벌써 부자다. 현재를 보고 미래를 보는 그의 안목은 여느 사람들과는 분명히 달랐다. 나는 그의 사업이 반드시 큰 결과를 가져오리라는 믿음을 안고 흐뭇한 마음으로 그곳을 떠났다.
잡지; '북녘마을'제8호편집부 이근명기자 [지월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