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수기 는 아니지만 남한수기 도 한번 보세요.(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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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29 07:18
새터민 여러분 안녕 하세요.한국에서 외롭고 많이 힘드시죠?
여러분들이 고향을 등지고 가깝지만 멀고먼길 을 돌아서 부모 형제 떨어져
얼마나 고생 하시고 마음의 한을 가지고 이땅에 사시고 계신다는걸 조금은 알고 있어요.
여러분들이 한국사회에서 차별과 마음에 느끼는 피해 의식은 어느정도 있다고 봅니다.
당연히 그럴 수 밖에 없다고도 생각이되요..
그래서 제말좀 하려 합니다.조금이나마 제가 겪은 일이 도움이 됬으면 합니다..(배부른 소리 아닙니다.)
저는 서울에서 3대째 태어나 본토 서울 출생입니다.
아버지는 살아계시면 85세신데 그 당시 남북이 갈라지기 전에도 있었던 유명한 대학의 경제학도 셨어요.
그 아버지 밑에서 태어나서 호강 하면서 풍요롭게 살았지요.
대학졸업 하시고 서울 명동에 은행원 으로 취직 하셔서 양복입고 하얀 셔츠에 낵타이 매시고
출근 하시던 전형적인 앨리트로 사시던 멋진 분이셨어요. 어느날 회사 그만두시고 이땅저땅 팔으셔서
연탄공장 을 운영하시게 되었어요.그후로....다른.. 사업에 또.. 다른 사업에...
연속적으로 실패와 사기에 점점 집안 가세가 기울어 지더니 아버지의 뜻하지 않는 병으로
암이라는 사형선고 를 받게 되었네요..제 나이 12살때입니다.
지금은 암이나 각종 보험이 많이들 들고 있지만 그 당시는 보험이 생소할때 였어요.
아버지의 암 선고를 받고 어머니는 저희 새남매 를 부둥켜 안고 많이 우셨지요.
그후 어마어마한 병원비에 누구도 돈버는 사람없이 병원비에 어머니의 극진한 간호와
초등학교 2명 중학교1명 세자자녀의 교육비와 양욱이 어머님의 얼마나 많이 힘드 셨을지
되돌아 보면 짐작이 갑니다.
그 이후로 아버지는 6년간 을 암과 투병하시다 돌아가셨 습니다.
이승과 저승을 오가실때 종교 를 믿으셔서 그나마 있으신 선산과 조금의 땅도 교회에 기증하시고
멀리멀리 저희 곁을 떠나셨죠.
한마디로 남겨진 식구는 초토화가 되었네요.
다니던 과외도 누나들 학원도 모두 그만 두고 어머니는 생전에 일도 안해 보신분이
아는게 없으니 공장에 나가서 일하고 누나들은 막내인 남동생 하나라고 밥차려주고
집안일을 도맡아 했지요.
그러다보니 누나들은 대학의 꿈도 다버리고 실업계 고등학교 를 갔고 사회에 일찍취업해서
엄마를 도우며 살았지요 그래도 어머닌 아들 하나있는것 많큼은 대학 보내자고
누나들하고 협심해서 저 서울에 있는 대학도 보냈내요.
비록 아버지 많큼 공부는 못했지만 나름대로 꾸준히 운동선수로 배운 운동이 있어서
체육 대학교 장학생으로 들어가게 되었 습니다.
그래서 희망도 품고 앞날의 설계도하고 모든것이나의 꿈과 목표만 을 가지고
꿈에 부풀어 있었지요.
제가 다니던 학교는 월요일부터~토요일까지 기숙사 생활 하면서 운동하고
토요일 저녁에 나와서 일요일 저녁엔 학교 기숙사로 복귀 해야하는 남들과 다른
좀 특수 학교여서 재미라곤 하나도 없는 학교지요.
남들은 대학가면 여자랑 미팅도하고 여자 친구와 교재도 하고 하는데 맨날 츄리닝에
맨날 학교에서 자고 술도 못먹고 선배들이 수시로 집합하면 열차래에 빳따맞기 일수고
참 재미라곤 찾아 볼수가 없는 그런곳이죠.
그렇게 1학년이 지나고 겨울방학에 저한태큰 악몽이 찾아옵니다...
오늘은 피곤해서 다음에 못다올린 글 마져 올리겠 습니다.여러분 즐거운 주말 되세요~~
여러분들이 고향을 등지고 가깝지만 멀고먼길 을 돌아서 부모 형제 떨어져
얼마나 고생 하시고 마음의 한을 가지고 이땅에 사시고 계신다는걸 조금은 알고 있어요.
여러분들이 한국사회에서 차별과 마음에 느끼는 피해 의식은 어느정도 있다고 봅니다.
당연히 그럴 수 밖에 없다고도 생각이되요..
그래서 제말좀 하려 합니다.조금이나마 제가 겪은 일이 도움이 됬으면 합니다..(배부른 소리 아닙니다.)
저는 서울에서 3대째 태어나 본토 서울 출생입니다.
아버지는 살아계시면 85세신데 그 당시 남북이 갈라지기 전에도 있었던 유명한 대학의 경제학도 셨어요.
그 아버지 밑에서 태어나서 호강 하면서 풍요롭게 살았지요.
대학졸업 하시고 서울 명동에 은행원 으로 취직 하셔서 양복입고 하얀 셔츠에 낵타이 매시고
출근 하시던 전형적인 앨리트로 사시던 멋진 분이셨어요. 어느날 회사 그만두시고 이땅저땅 팔으셔서
연탄공장 을 운영하시게 되었어요.그후로....다른.. 사업에 또.. 다른 사업에...
연속적으로 실패와 사기에 점점 집안 가세가 기울어 지더니 아버지의 뜻하지 않는 병으로
암이라는 사형선고 를 받게 되었네요..제 나이 12살때입니다.
지금은 암이나 각종 보험이 많이들 들고 있지만 그 당시는 보험이 생소할때 였어요.
아버지의 암 선고를 받고 어머니는 저희 새남매 를 부둥켜 안고 많이 우셨지요.
그후 어마어마한 병원비에 누구도 돈버는 사람없이 병원비에 어머니의 극진한 간호와
초등학교 2명 중학교1명 세자자녀의 교육비와 양욱이 어머님의 얼마나 많이 힘드 셨을지
되돌아 보면 짐작이 갑니다.
그 이후로 아버지는 6년간 을 암과 투병하시다 돌아가셨 습니다.
이승과 저승을 오가실때 종교 를 믿으셔서 그나마 있으신 선산과 조금의 땅도 교회에 기증하시고
멀리멀리 저희 곁을 떠나셨죠.
한마디로 남겨진 식구는 초토화가 되었네요.
다니던 과외도 누나들 학원도 모두 그만 두고 어머니는 생전에 일도 안해 보신분이
아는게 없으니 공장에 나가서 일하고 누나들은 막내인 남동생 하나라고 밥차려주고
집안일을 도맡아 했지요.
그러다보니 누나들은 대학의 꿈도 다버리고 실업계 고등학교 를 갔고 사회에 일찍취업해서
엄마를 도우며 살았지요 그래도 어머닌 아들 하나있는것 많큼은 대학 보내자고
누나들하고 협심해서 저 서울에 있는 대학도 보냈내요.
비록 아버지 많큼 공부는 못했지만 나름대로 꾸준히 운동선수로 배운 운동이 있어서
체육 대학교 장학생으로 들어가게 되었 습니다.
그래서 희망도 품고 앞날의 설계도하고 모든것이나의 꿈과 목표만 을 가지고
꿈에 부풀어 있었지요.
제가 다니던 학교는 월요일부터~토요일까지 기숙사 생활 하면서 운동하고
토요일 저녁에 나와서 일요일 저녁엔 학교 기숙사로 복귀 해야하는 남들과 다른
좀 특수 학교여서 재미라곤 하나도 없는 학교지요.
남들은 대학가면 여자랑 미팅도하고 여자 친구와 교재도 하고 하는데 맨날 츄리닝에
맨날 학교에서 자고 술도 못먹고 선배들이 수시로 집합하면 열차래에 빳따맞기 일수고
참 재미라곤 찾아 볼수가 없는 그런곳이죠.
그렇게 1학년이 지나고 겨울방학에 저한태큰 악몽이 찾아옵니다...
오늘은 피곤해서 다음에 못다올린 글 마져 올리겠 습니다.여러분 즐거운 주말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