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에게 당당한 엄마가 되고 싶었다" 4
- 우리 역사에는 대의와 가족 사이에서 갈등한 인물들이 많다.
새삼 안중근 의사가 참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가정과 자식이 있었는데 자기 몸을 대의를 위해 던졌다는 것은 우리가 짐작하는 것 이상으로 대단한 것이다. 가족들의 삶이 비참해질 것을 알았으면서도 어떻게 그렇게 자기를 불사를 수 있었을까? 그러나 한편으론 그의 아들 안준생도 이해가 간다. 아니, 오히려 나는 안준생의 편을 들고 싶다. 그의 ‘변절’에 대해서 말들이 많은데, 《이토 히로부미, 안중근을 쏘다》에서 읽은 내용 중 안준생이 “아버지는 나라의 영웅이었지만 가족에겐 재앙이었죠. 나는 나라의 재앙이었지만 내 가족에겐 영웅입니다” 하는 부분에서 깊이 공감이 되었다.
책을 읽고 그렇게 펑펑 울어보기는 생전 처음이었다.(눈물이 글썽)
일제의 감시와 괴롭힘 속 ‘영웅의 아들은 개 같은 삶을 살고, 변절자의 자식은 다시 성공’하는 당시의 시대상 속 안준생의 가족을 위한 ‘변절’을 이해한다. 그때와 지금, 세상이 얼마나 바뀌었는지 모르겠다. 남한과 북한 모두, 사극에서나 볼 수 있는 계급사회를 보여주고 있지 않나.
- 시골에서 살지만 더 치열한 고민을 하며 산다. 혹시 발톱을 숨기고 갈고 닦는 기간인 건가?
발톱? 그런 것 없다. 발톱은 우리 집 고양이들에게나 있지.(웃음)
- 고양이 많이 키우나?
일곱 마리 키운다. 밥을 챙겨주다 보니 그렇게 됐다. 하루는 밖에 있는 새끼고양이가 추울 것 같아 담요도 덮어주고 먹이도 주었는데, 나중에 어미고양이가 그 새끼를 물고 와 내 앞에 놓더라. 내가 자기 새끼 건드려서 기분이 나빠서였는지, 내가 잘 키워줄 것 같아서였는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놓고 가버렸다. 부랴부랴 시내 나가서 고양이분유에 젖병 사와서 애지중지 키워주고 있다. 아들도 자기 동생이라면서 끔찍이 이뻐한다. 이름도 ‘양순이’라 지어줬다. 졸지에 늦둥이 하나 생겼다.(웃음)
- 채널A에서 방송되는 ‘이제 만나러 갑니다’(이만갑)가 대중화에 성공했다. 탈북자들을 패널로 ‘남과 북의 화합을 모색하는 소통 버라이어티’를 표방하고 있다.
서울 있을 때 세 번 정도 출연요청이 왔는데 거절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구조는 아니더라. 남한에서 탈북자들이 얼마나 살기 힘든지, 탈북자들의 인권에 대해서 말을 한다고 하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너무 고발성이 짙어 재미를 추구하는 자기들 프로와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하더라. 들리는 이야기로는 방송을 위해 꾸며서 하는 말들도 많다고 한다. 정작 소통을 추구할 수 있는 똑똑한 탈북자들은 북한에 가족이 있어서 공적인 자리에 나서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소박하게 자기 삶을 잘 꾸려가는 탈북자들이 많은데, 정착 성공사례라면서 여기 저기 종편방송에 소개되던 한 탈북 사업가는 수백억 원 대 사기를 쳐서 해외로 도망쳤다. 국군포로들의 보상금까지 사기쳐서 대만으로 갔다느니, 보위부로 갔다느니 말들이 많다. 탈북자 사회에 자칭 지도층 운운 하는 그런 몇몇 사람들이 성실하게 잘 사는 다수의 탈북자들도 싸잡아 욕을 먹게 한다. 탈북자 사회는 ‘지금은 그저 조용히 살 때’라는 분위기다.
- 지금 시점에 교회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나? 아, 교회는 다니시나?
하나원에 있을 때 교회 참 열심히 다녔었다. 새벽기도도 나갔다. 열심히 기도만 하면 하나님 아버지가 다 이뤄주신다고 해서.(웃음) 경상도에 정착하고 나서도 교회를 다녔었는데, 식당에서 일하게 되면서 못 나갔다. 일요일에 문 닫는 식당이 어디 있나. 그래서 못나가게 되었고 나중에 주말에 쉴 수 있는 일을 하게 되면 나간다고 했는데 요즘은 1년에 서너 번 나간다. 사람들 만나러 가는 거다. 낯선 사람에게 정을 주는 문화가 특별히 따뜻하게 느껴졌었다. 신앙심은 높지 않다. 그래도 ‘하나님, 아버지!’ 하면서 사기를 치거나 큰 교회 다니면서 돈을 받지는 않았다. (수도권의 몇몇 대형교회는 출석을 조건으로 20~30만 원씩 돈을 지급한다) 그건 아버지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회개하면 다 용서해준다’면서 자기합리화를 하더라. 신앙과 금전이 교환수단이 되어선 안 될 텐데…. 그게 용납되는 사람들을 보면 신기하다.
불교도 마찬가지다. 내가 불교 대학에 다녔다. 초파일 행사에 참여했는데 사람들 이름을 부르기에 뭔가 했더니 건물을 신축하는 데 헌금한 사람들을 액수 순으로 부르는 거였더라. 나중에 총무원장 스님이 “왜 불교 대학 학생들이 교회에 가느냐?”며 노여워 하시기에 내가 “건물 짓지 말고 그 돈으로 기독교처럼 탈북학생들에게 책값이라도 쥐여 주세요” 귀띔해준 적이 있다.(웃음) 남과 북이 모두 돈의 노예가 되었다. 돈과 거리를 두어야 할 종교가 배금주의에 물들었으니 다른 영역은 오죽할까. 그럼에도 진심으로 탈북자들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분들은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1년에 서너 번 교회에 나가는 나에게도 안부 물어주면서 떡국 먹으라고 불러주면 마음이 따뜻해진다. 교회가 탈북자들에게 정을 주고, 곁에 있어주고, 한 상에서 밥 먹는 것보다 더 좋은 게 있을까.
- 꿈이 무엇이었나?
꿈? … 글쎄. 무엇이었을까... (긴 한숨)
인터뷰 후 저녁 식사를 함께 하며 질문을 건넸다. 탈북자들이 신변의 안전이나 촌스럽다는 이유로 남한에 와서 이름을 종종 바꾸곤 하는 데 왜 원래 이름 그대로를 사용하고 있는지. M이 말했다.
“북한에서는 모든 것이 국가의 소유잖아요. 유일하게 내 것이었던 게 있다면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 이름밖에 없어요. 이름만큼은 촌스럽더라도 끝까지 지켜야겠다고 생각했죠.”
이런 그녀를 ‘익명’ 안으로 숨게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는 자유민주주의는 그녀의 어떤 표현이 불편하고 두려웠던 것일까?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섣부른 해답’이나 ‘대의의 회복’이 아니라, M의 실명(失名)과 절망에 함께 참여하는 긴 시간이다.
진행 이범진 기자 poemgene@goscon.co.kr 2014년 11월 7일
이범진기자 - 사람과 상황 기독교잡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