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착 경험 2

정착 경험 2

댓글 : 11 조회 : 6014 추천 : 0 비추천 : 0
  새 집에서 새 그릇에 첫 밥을 해서 먹자니 눈물이 바가지로 쏟아지는 걸 애 때문에 인차 그치고 한술 뜨고는 딸내미에게 집을 맡기고 이제는 대한민국 국민의 의무를 해야 하니
  나는 혼자가 아니다 나에게는 어머님과 딸내미들이 있다! 모두 모여 살 그날까지 홀로 서보자! 하고 아침 9시에 일자리를 찾아 보러 나갔습니다.   
   길가에 있는 교차로 신문을 빼가지고 길 따라 쭉 내려 가면서 사람을 채용한다는 식당들에 들어가 물어 보았더니 슬슬 눈치 보면서 그냥 사람 구했다고 하더군요.
   다시 전철 역부터 반대켠 길로 올라 오면서 쭉 흟어 올라 오다가 교통비를 아끼려면 집 근처 에서 일하리라 마음먹고 제일 먼저 들어 갔던 감자탕 하는 식당에 다시 가서 우선 식사를 주문했습니다.
   밥을 다 먹고 나서 " 이 집 감자탕 참 맛있네요. 비법이 따로 있나 봐요?" 하면서 이 말 저 말 해 보는데 사장님이 오더니 어디서 왔는가 하기에 북한에서 왔다고 했더니 한국에 와서 일 좀 해 봤냐고 묻더군요.
   "아뇨 어제 처음 집을 받고 나왔어요" 하니까 그럼 같이 일 해 보자고, 어제 왔는데 벌써 일하겠다는 생각이, 그 욕심이 맘에 든다며 여기서 이제 부터 식당 일을 배우라더군요.
   감자탕집 주방일이란 쉽지가 않았습니다. 하지만 뼈를 삶고 채소 씻어서 준비 하는것들이 목숨 걸고 숨어 다니던 타향살이 날들에 어찌 비기겠습니까?
   땀이 비오듯하고 불앞에서 처음하는 일이지만 여자일이라 이런 저런 어려움이 있어도 사장님의 믿음에 보답해야 한다는 생각도 있고 그리고 또 하는 일도 즐겁고 좋았습니다.
   북한 말투 때문에 입 꾹 다물고 눈치껏 일만 한다는게 어려웠지만 처음 찾은 일 이라서 꼭 1년은 견뎌 내리라 이 악물고 참았더니 하루 하루 지날 수록 견딜만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달도 못 채우고 뜨거운 돼지뼈 빠꾸통을 들다가 떨구어 그만 팔 다리를 데면서 허리까지 삐끗하게 되었습니다.
   그날 오후부터 자리에 누웠는데 애는 학교에 다니니 낮 시간에 물 떠줄 사람도 없더군요.
   그렇게 보름 앓다가 밖에 나와서 겨우 겨우 걸어 교회 부터 찾아서 정말 열심히 일하며 살고 싶었는데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 나냐고, 서럽게 울었습니다 .
   한참을 울며 기도를하고 다음 날도, 또 다음 날도, 걷는 것이 우선 나의 치료다 하고 처음에는 한시간 걸어서, 다음날은 50분 걸어서, 또 다음날은 40분 걸어서 매일 교회에 나가기 시작 했습니다.
   이렇게 닷새 째 되는 날에 김용천 장로님께서 집에 가려는 저를 불러 " 새 신도 님이시죠? 갑자기 안 보이더니 왜 많이 아픈것 같은데 ~~~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제가 당장 일하고 싶다고 하자, 그래~ 그럼 여기는 살살 다니면서 청소 일을 해도 되니 우리 교회를 담당 하고 있는 즉, " 태진 용역회사" 에서 일하라고 하시더군요.
   그렇게 되어 다쳐서 20일 만에 태진 용역 회사에서 4대 보험 신청하고 환경 미화원으로 청소 일을 시작하였습니다.
   월급이 78만원이었는데 사실 기초생계수급자이면 집에서 그냥 치료 받아도 74 만원을 받을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사회에 빨리 적응하고 또 돈을 벌어서 브로커 비용도 물어야 했기 때문에 한달이 지나서 부터는 정말 요령까지 생겨 더 열심히 일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석달이 되면서 부터는 이 업종에서 사장이 되고 싶어 하루 쓰는 양의 소모제 부터 일체 반장이 하는 일, 기계 다루는일까지 짬만 있으면 내 손으로 해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자신감도 생기고 주위의 믿음도 생기면서 좋기도 하고 또 한편 함께 일하는 10년, 6~8년 되는 선배들의 눈밖에 나서 왕따가 되는것 같은 느낌도 받았고, 매일 같이 적당히 일하라는 협박 같기도 한 충고도 받았었습니다.
   하지만 나름대로의 꿈이 있어 정말 단 하루도 땀에 절은 옷 갈아 입지 않은 날이 없이 뼈를 바쳐 일하며 정말 악착 같이 살았습니다.
   부모님이 저를 아주 귀하게 또 강하게 키워 주신 덕에 죽을듯이 힘들었다가도 하루 밤 자고 나면 또 새 힘이 생기고, 집앞 초등학교에 다니며 키도, 마음도,사랑도 점점 커가는 딸내미 또한 저의 비타민 역활을 해 주었습니다.
   언제나 용돈을 주면 하나도 안쓰고 건사 했다가 신음소리 내면서 자는 내 머리맡에 놓아 주군 하는데 그러지 말라고 하면서도 그게 눈에 밟혀서 더 열심히 살게 되더군요.
아! 잊혀 지지 않는 일이 있었습니다.
   다섯 달 되던 어느 날 대 강당 청소를 하는데 이곳에서 일한지 10 년 된 5살 연배 윗분 선배가 태희씨는 민주당 편이야 한나라당 편이야 그러길래, 대답을 피하자 다시 뭍는겁니다.
   그래서 "전 그냥 집권당 편하는게 좋습니다." 라고 했더니 " 하 요거 봐라, 요거, 빨갱이들은 요렇다니까, 완전 박쥐 아니야? 박쥐? 요쪽편 들다가 조쪽편 들다가 그러니까 글쎄, 그을-쎄 역쉬나 살줄 알어, 봐봐 사람은 똥집보면 다 알린다니까 " 그러는거예요.
   아! 머리가 순간 하얀게 뗑! 하더군요. 밀대를 밀다가 서서 좀 참았습니다. "그래 하나라도 배운 내가 참자! 앞으로 살면서 수도 없이 이런말을 들을 때 마다 싸울거야?
   아니잖어 지는게 이기는거야. 참는자가 이기는거야 하고 " 꾹 참고 청소만 썩썩 해 나갔습니다. 갑자기 조용해 지더니 눈치들을 보더군요.
  저도 한참 분위기를 느끼다 보니 속이 후둘 후둘 떨렸던지라 그 다음 시간에 목사님 방 청소를 하다가 여기 저기를 잘못 건드려 가지고 며칠동안 성의 있게 준비하시는 컴퓨터 자료를 훌쩍 날려 보냈지 뭡니까?
   황당 했습니다. 정말로 당황 했습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이 하얗게 질리셨던 방금 전 과는 다르게 아주 편하게 " 태희성도님 잘못 없습니다. 제가 미리 미리 끝냈어야 하는데 선밥을 먹으려고 했으니 오늘 밤 다시 준비하면 됩니다. 너무 맘쓰지 마세요." 하시더군요.
   그날 저녁 퇴근하고 너무 미안하여 저녁 간식 거리를 사서 경비 아저씨 한테 목사님 드리라고 하고 12층에 올라가 찬양대 실에서 늦도록 피아노를 치다가 막차 시간에 퇴근하며 보니 방에 그냥 불이 켜져 있더군요. 참 죄송했습니다.
   그리고 무식 해서 죄를 지은 제가 너무 부끄럽고 싫었습니다.
   이것이 무식을 깨우쳐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했고 결국 대학에 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게시물에 달린 코멘트 11
본문_작성자  2013.02.26 23:16  
진실함이 묻어나는 정착기2편도 잘 읽었읍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항상 함께하실꺼에요!
본문_작성자  2013.02.27 00:10  
너무너무 잘 읽었습니다. 오늘은 많이 늦어서 나머지는 내일 읽어야겠네요. ^^; 온라인이나 오프라인이나 입에 빨갱이 달고 사는 인간 치고 인성이 제대로 된 인간 없더군요.
본문_작성자  2013.02.27 17:53  
아무리 생각해도 님이 잘못하신 거 하나도 없습니다. 전산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불문율이 하나 있습니다. "프로그램 잘 못 짠 거는 용서 되지만, 저장 안 해 놔서 자료 잃어버리는 것은 용서 못 받는다..."
본문_작성자  2013.02.27 22:17  
열심히 정착하여 가는 모습이 보기 좋습니다 .행복 하시길
본문_작성자  2013.02.28 01:19  
이나라에서는 종교의 자유만큼이나 투표선택의 자유가 있읍니다 그사람 완전 미친사람이군요.
본문_작성자  2013.02.28 12:42  
이 글을 읽어 내려가니...갑자기 눈시울이 핑돕니다,^&^
롤링스톤  2013.03.14 20:27  
태희님 역시 대단하세요. 잘 읽었습니다.
본문_작성자  2013.03.22 01:06  
확고하게 자기 의사를 표현할걸 그랬군요. 보기를 우숩게 보는 진짜 배운게 없는 자군요...
본문_작성자  2013.05.16 22:15  
이글을 읽고 게으른 제가 참 부끄럽네요 태희님은 꼭 잘되실겁니다
동틀날  2013.11.05 18:23  
역시 우리 새터민 다르네요...
본문_작성자  2014.08.11 17:35  
어딜가나 꼴깝하는 인간들은 하나씩 있는데, 아니 밀대로 머리한대 때리지 그랬어요' 야! 밴댕이야' 하면서
제목
Facebook Twitter KakaoTalk KakaoStory NaverB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