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착 경험 4

정착 경험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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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북한에서는 누구나 고등중학교 4,5,6,학년 때 3년간 해마다 정무원 시험이 있는데 전국적으로 동시에 보는 시험입니다. 그 시험은 누구나의 평생 운명을 결정하는 아주 중요한 시험이므로 학교에서 총등수, 구역 군에서 총등수가 매겨 집니다.
   결국 이 시험 점수가 시 구역 구에서 10등~ 100등 안에 들어야 평양 중앙 대학과, 300등안에 들어야 지방 대학들에 추천받을수 있는 권한이 주어진답니다.
   저도 평양 김책공업대학에서 입학 시험을 보다나니 아찔한 경쟁률을 뚫어야 했는데 시험을 보고 얼마 후에 김책공대 학부장이었던 어머니 대학 시절 친구로 부터 전화가 왔죠.
   여자인데 사범대학을 보내라고, 내 성적이 겨우 붙기는 했는데 제일 중요한 수학, 물리 성적이 약하고 혁명역사, 국어, 영어가 높다고 앞으로 공과 대학에서 연구원으로 일하기에는 기초 과목이 너무 낮아 안되겠다는겁니다.
   그러다 보니 저는 합격 통지서가 김책공대에서 전학 하는 식으로, 사범대학에서 왔기에 대학에 가니 교과목 시간표가 나오고 입학식이 끝나고 그날 부터는 예비과 정규대학 생활이 시작 되었습니다.
    (아 참 그 시절 저의 대학 동기가 얼마전 탈북하여 부산에서 살고 있습니다.)
   여기는 과목 신청을 본인이 하라고 하는데 어떤 과목을 해야 하는지 어떤 진로를 택해야 하는지 전공 과목? 필수 과목? 아! 완전 아기 콩밥 먹이기 였습니다.
   저는 교육학, 어린이 보육 교양학, 아동 심리학, 청소년 이해 상담학, 인간 행동, 정신건강 , 이런 과목들이 좋았는데 결국 교수님 방조를 받아 적당히 선정했고요, 실지 매스미디어 같은 시간은 외래어를 너무 많이 쓰니까 어렵더라구요.
   한켠으로 컴퓨터를 배우면서 한쪽으로는 과목 마다 요구하는 레포트 정리 하는것이 첨에는 정말 땀빼게 힘들었습니다.
   시작이 절반이라 모를 때는 캄캄 하더니 한 두번 해 보니까 그 다음 부터는 어렵지 않았고
그렇게 이곳에서의 대학 생활도 적응이 되었습니다.
   2학년 어느날 대학에서 창작 발표회가 있었습니다. 재간이 별로 없다 보니 저는 노래를 하나 지어 이쁘게 꾸며서 가져다 걸었습니다.
   와 정말 멋진 창작품들이 번쩍 번쩍 하게 걸려 있는데 저는 참 부끄러워 그냥 내릴까도 생각 했었습니다.
   그런데 미국에서 임시 와 계시는 박 교수님이 저의 노래에 관심을 가지셔서 여러 사람이 함께 들었는데 꽤 괜찮았다면서 특등 다음의 상 인 1 등을 주기로 했다는겁니다.
   며칠 후에 어떤 모임 계기가 있을 때 학생 회장이 소개를 하고 제가 피아노 반주를 하면서 그 노래를 제가 직접 불렀습니다. 객석에서 우는학생들도 보이더군요.
   그리고 요란한 박수 속에 상과 함께 현금을 넣은 봉투도 받았구요.
   늦깍기 대학생이다 보니 매일 같이 공부 마치고는 도서실에서 밤늦게 까지 있다가 막차 타는게 일쑤였습니다. 그렇게 차츰 재미를 붙여 가던 어느 날
   북한에서 어머님이 몹시 다쳐 병원에 계시는데 돈이 당장 급하다는 소식이 왔습니다.
   생계비 74만원으로 초등학생 딸내미와 함께 생활하느라 나도 저축도 없이 겨우 겨우 맞춰 살아 가는데 정말 답답 하더군요.
   바로 며칠 후 어떤 저녁 모임이 있었는데 시작 할 때 부터 어떤 분이 저쯤에서 계속 나만 보는것 같더니 끝나기 바쁘게 한 70대 어르신이 다가와 악수를 청하면서 탈북자들을 위한 일을 하는 사람이라며 명함을 주더군요.
   그러더니 저보고 사모님이 연락 안하실 수도 있으니 미안하지만 학생 번호를 좀 알려 달라고 하기에 드렸더니 매일 같이 문자가 오고 하다가 어느 날 대학 정문 앞에서 기다린다고 꼭 중요 하게 할 말이 있다며 저녁을 같이 하자고 하더군요.
   없는 시간을 내서 저녁을 같이 먹고는 차로 어딘가 모신다고, 강연 행사장에 가보면 안다고 해서 같이 갔더니 서울대 유명 교수님이 열변을 토하는데 들어 보니 다단계 같은 느낌이 들기에 전 이런데 바칠 시간이 없다고 했더니. 아직 여기 현실을 몰라서 그런다네요.
   대한민국에 와서 제일 빨리 적응하고 돈 벌어 성공하는데가 바로 여기라고, 돈벌자고 한국 온게 아닌가고, 대학 공부도 돈을 더 많이 벌기 위한 진로 일뿐이라고 하더군요.
   가장 빨리 일어 설 수 있는 곳이 바로 여기라면서 자기도 미국에서도 대학을 나왔고 한국에 와서도 대학 2개를 나왔으며 지금 박사로 일한지 오래 됐고, 지금은 쓰리쟙을 해서 한달에 500 넘게 돈을 벌지만 조금만 더 해서 1000 만원씩 벌어서 북한에 교회를 세워 통일 대비 준비를 하고 있다는겁니다. (후에 알고 보니 그때 보여준 통장이 자기 스폰서 것이었더군요.)
   집에서 돈을 보내라고 하는 절박한 때에 그것도 그 어르신 통장에 매달 500넘게 들어 온 생생한 현실을 직접 보고는 저도 밤 9시 이후 부터 11시 까지 매일 강의도 듣고 또 직접 새로 오시는분들에게 내가 먼저 강의 자료를 외워서 강의를 해서 돈도 받으며 재미를 붙이기 시작 하였습니다.
   바로 그 때는 새터민쉼터에서 그렇게 반대 하는 말을 귀등으로도 안 들려 가지고 2년이라는 그 아까운 대학 시절과 친지들과의 귀중한 시간을 다 버리고 그 어르신 말에만 귀가 항아리 만하여 돈 버는 가장 빠른 길을 택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어르신을 따라, 아니 돈을 따라 전국 각지로 돌아 다니면서 하이리빙 물건을 팔러 다니기 시작 하였습니다. 무슨 고생 인들 안 해 보았겠습니까?
   정말 아니다 싶다가도 그 어르신의 정열에 푹 빠져 가지고 정신 없이 헤매다 보니 몇달이 되어서야 아! 속았구나! 내가 제 정신이 아니였구나 하는 걸 알았습니다.
   한편 나도 미래를 위한 쓰리쟙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교사 아카데미도 꼭꼭 참가 하고 어느 하루 하이리빙 강북 월곡 지사 연단에 나가 몇백명 앞에서 스피치를 완전 기백있게 하고 들어와 앉는데 내 의자에 웬 쪽지가 있네요.
   (남남 북녀 커풀 메니저 하지 않겠는가고? 생각 해 보고 연락 달라)기에 쓰리쟙 하고 싶어 그 일 역시 선뜻 응하고 명함 찍을 때 결혼정보 소장이라고 만들어 그것도 하기 시작 했습니다.
  돈! 돈 따라 가는 길이 이렇게 험 할 줄이야 어찌 다 알았겠습니까?
   나도 300 이상을 벌고 싶었으니까요. 그래서 저녁 7시 부터 아침 7시까지 싸우나 카운터 일까지 겸하니 하루 2~3시간도 못자고 일 했던것 같습니다.
   진짜 돈은 360~380 이상 벌었습니다만 몸이 너무 너무 힘들더군요. 돈이 사람 잡습니다 

이 게시물에 달린 코멘트 6
본문_작성자  2013.02.27 22:27  
자본주의 체제에 물 들어가는 모습을 보는 듯 합니다.
본문_작성자  2013.02.28 12:50  
아~~고생 많으셨습니다. ㅠㅠ
파도소리  2013.02.28 15:45  
맡습니다.돈이 사람 잡습니다.
롤링스톤  2013.03.14 20:33  
쓰리잡 ㅎㅎ 말이 쉽지 진짜 대단하십니다.
본문_작성자  2013.09.11 00:24  
대단 하시네요
동틀날  2013.11.05 18:46  
빨 리 깨칠수록 조은겁니다 쉽게 버는이들도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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