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만 있어다오 2.

살아만 있어다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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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시간이 흘러서 장학금 수여식 행사는 마무리되었고 나는 서둘러 A를 만났다. 두 손 꼭 잡은 채 조용한 커피숍을 찾아 자리를 잡았다. 잠시 여기 저기 뜯어보니 아주 오래전 친구네 집에 놀러 가면 반가이 맞아주던 그 모습이 그대로 생생히 살아있다. 가무잡잡한 피부에 머루알처럼 까맣던 눈동자를 가진 야윈 모습의 앳된 소녀를 십 수 년이 지나 이렇게 낯선 서울의 하늘아래서 삼십대 중반의 아줌마의 모습으로 다시 만나게 될 줄을 어찌 알았을까?

 

A의 가족들과 얽힌 추억들이 그 짧은 시간 미처 말릴 사이도 없이 스쳐지나간다. 착하고 어질었던 A의 언니, 그리고 순박하고 정이 많았던 A의 어머니, 전교 1등으로 똑똑하고 야무져서 선생님들 누구나 칭찬했던 A의 오빠, A의 언니랑 또래 친구들과 달래랑 토끼풀을 캔다고 동네 뒷산에 오르내리던  거며, A의 언니는 영민한 오빠와 자꾸 비교당하는 것이 속상해서 투덜대던 기억까지, 기억 어디선가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A의 가족들, 친구들, 고향에 대한 추억들이 십 여 년이 지난 오늘날 이렇게 생생히 떠오르는 것이 참으로 신기했다. 역시 사람은 추억을 먹고 사는 존재인가부다.

 

그 뒤 두 시간 남짓 우리가 허겁지겁 나눈 내용은 실로 방대한, 어마어마한 양이였다. 짙은 갈색의 아메리카노를 조금씩 홀짝 홀짝 들이키며 A가 털어놓는 이야기는 눈물 없이는 들을 수가 없었다. 친구네 집은 전부 6, 아버지, 어머니, 22녀의 단란한 가정이었지만 십 수 년 뒤 지금은 살아남은 사람이 3명이란다. 오빠는 군대에 입대하여 생활하던 중 영양실조가 걸려서 돌아온 지 두 달만에 한 많은 젊은 생을 마감해버렸고 집안의 든든한 기둥이던 장남을 잃게 된 부모님은 반 실성을 하셨다고 한다. 친구의 오빠는 학교의 사로청위원장까지 하였을 정도로 촉망받는 재원이었다. 그러나 피끓는 청춘을 조국에 바치겠다는 비장한 각오로 솔선수범하여 군대에 입대했으나 돌아오는 결과는 한 가정이 무참히 깨어질 정도로 가혹한 것이었던 것이다.

 

 

이후 고난의 행군시기 북한의 배급생활가정들이 그러했듯이 거듭된 식량난으로 친구네 가정은 풍지박산이 났으며 A는 식량을 구해오겠다고 두만강을 넘었다고 한다. 돌아올 수 없는 길임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었고, 다시 강제북송의 위협을 피해 남한행을 시도했으나 동네 중국사람의 신고로 공안에 잡혔고 도문을 거쳐 북송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잡힌 몸으로 어찌 어찌 고향까지 갔더니 폴싹 늙으신 부모님의 모습이 그렇게나 가슴 아플 수가 없었다고 한다. 뼈만 남은 몸을 추세울 동안 하루같이 결심한 것이 가다가 죽어도 다시 강을 넘어야 겠다는 다짐이었다고 한다. 머물러 지내는 동안 가족들과의 갈등도 많았다고 한다. 다들 마음을 돌려세워 고향에서 눌러 살자고 설득을 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도저히 그러지를 못하겠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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