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에게 당당한 엄마가 되고 싶었다” 1

“아들에게 당당한 엄마가 되고 싶었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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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에게 당당한 엄마가 되고 싶었다

(2014년 11월 인터뷰내용입니다. 감안해서 읽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 탈북 12년 째 맞은 M의 실명(失名)과 절망-

현재 남한에 거주하는 탈북자는 약 25천 명. 70여 곳이 넘는 탈북단체가 있으나 목소리는 천편일률적으로 극우적이거나 보수적이다. 이들 단체는 북한에 삐라를 날려 보내거나, 여 야사이 정치적 갈등이 있을 때마다 각종 퍼포먼스로 보수정당을 지원한다. 대다수 탈북자는 이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그저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산다. 언제나 간첩으로 조작될 위험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다른 목소리를 내는 것은 살얼음판을 걸어가는 것처럼 위험하고 조심스러운 것이다.


M(38)은 이런 분위기를 거슬러, 자기만의 목소리를 내왔던 몇 안 되는 탈북자 중 한 명이다. 그녀는 탈북자들의 인권을 위해 활발하게 활동했고, ‘진보적인의견을 가진 시민으로 여러 매체에 토론자로 나서길 마다치 않았다. 남한사회 내 탈북자에 깊숙이 드리워져 있는 오해와 편견에 맞서기 위해서였다. 한 번은 대통령이 참석하는 공군 에어쇼에 하루 전 날 신원 확인 불가로 참석이 불가하다는 연락을 받고 청와대와 공군 사령부를 상대로 소송을 준비하기도 했다. (이에 대한 후폭풍으로 이혼을 감내해야 했다.)

여성노동운동의 대모이우정 선생의 이름을 딴 평화장학금을 받기도 했던 M의 롤모델은 동독 출신의 독일 여성 총리 앙겔라 메르켈(Angela Dorothea Merkel)였다. 10, 20년 후 통일 한반도에서 메르켈 같은 여성 정치인이 되겠다는 포부였다. (그녀의 익명 M메르켈에서 가져왔다.) 이후에도 국회 인턴 등을 경험하며 활기찬 활동을 이어갔던 그녀가 돌연 잠적(?)했다. 인터뷰를 요청하자 익명을 요구했다. 이유를 듣고자 117, 경상도 시골로 향했다.

- 갑자기 익명보도를 요구한 이유가 궁금하다. 그동안 진보적인 탈북자로 여러 매체에 당당하게 실명으로 인터뷰하거나 토론자로 나서고, 글도 써오지 않았나.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었나?

자의 반 타의 반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에 표현의 자유라는 것이 있을까? 탈북자들에겐 그나마 있는 자유도 제한되는 경우가 많다. 그동안 내가 나의 목소리를 내는 대가로 가족들이 고스란히 아픔을 감내하고 있었다. 돌아보니 가족들의 심적 피해가 너무 컸다고 본다. 그럼에도 표현의 자유가 우리(탈북자)에게도 있다고 믿었었고 민주주의나 통일이라는 대의를 위해, 그리고 내 아들에게 당당한 엄마가 되기 위해 정치 현장에도 나아가 목소리도 내고 일을 도왔는데, 결과적으로 회의감이 밀려왔다.

- 회의감이 든 이유는 무엇인가?


진보정당도 보수정당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몸소 겪었다. 내가 돕던 인천시 남동구 모 후보님에게 내가 겪고 본 이것이 혹시 대한민국 곳곳에서 벌어지는 정치의 축소판인가요?” 물었더니 그렇다라고 답하시더라. (M은 더 이상의 자세한 이야기가 언론에 공개되는 것은 부담스러워했다.)

- 2년 전 여름(가을) 공군 에어쇼 사건으로 홍역을 치렀다. 어떤 사건이었고, 어떻게 정리되었나?

2012년 여름(초가을 95일이였으니) 당시 다섯 살이던 아들에게 공군 에어쇼를 보여주려고 동반신청 했는데, 참석 전날 밤에 공군 행사준비에 관여하는 오모 상사로부터 전화가 왔다. “청와대 경호실에서 신원 확인이 안 된다며 에어쇼에 참석시키지 말라고 했다는 내용이었다. 이명박대통령이 참석하지만 모든 국민을 대상으로 한 행사였고, 행사 전 입장을 거부당한 사람은 유일하게 나 한 사람이었다. 도무지 납득할 수 없어서 청와대 홈페이지 국민신문고에 항의하는 글을 올렸는데 탈북자라는 이유로 참관 불가의 뜻을 어떤 식으로도 표명하지 않았다고 하더라. 소송하기로 결심했고, 민변(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에서도 사건을 맡아 진행하기로 했다.

피고가 청와대와 공군 사령부 두 군데였는데 결국엔 공군이 다 뒤집어써야 하는 분위기로 흐를 것 같아 소송하지 않기로 했다. 나에게 전화로 청와대의 뜻을 전했던 공군 간부의 인생이 나 때문에 물거품이 되어선 안 되니까. 또 정작 해명해야 하는 청와대는 말 바꾸기를 거듭하며 계속 뒤로 숨고 있었다. 필요한 서류 준비까지 다 해놓고 골백번은 더 생각했는데 가족부터 시작해 주변에서 계란으로 바위치기라고 모두가 말리더라. 그렇게 그 일은 공군의 사과로 일단락(?)되었다.

- 개인적인 이야기라 질문하기가 조심스럽다. 관련 사건이 언론을 통해 불거지면서 이혼을 당하는 계기가 되었다. 청와대를 상대로 싸운다는 것이 가족으로선 부담이었던 건가?

시어머니의 오해 때문이었다. 여기(안동) 시골 노인들이 인터넷을 할 줄 아나, 조중동이나 한경오같은 신문매체들을 다양하게 보기를 하나? 지금 생각하면 대한민국 사람(어르신)들의 평균 의식이었다. 친정아버지에게 사람들이 몰려와서 당신 딸이 서울에서 종북좌파 활동을 하고 있다말할 정도였다. 하루에도 수십번 전화 와서 난리도 아니였다. 친정아버지는 제발 당신이 죽을 때까지만이라도 그런 정치 활동하지 말고 쥐죽은듯이 가만히 있으라고 하시더라. 친정 부모님이 그럴 정도인데, 피 한방울 안섞인 시어머니는 오죽했을까. 탈북자인 내가 진보적인 발언을 계속하니까 북한을 편드는 것으로 느꼈는지 간첩운운했다. 이런 상황이라면 대한민국 어느 시부모가 난리 치지 않겠나. 다 이해한다. 경상도 사람들 원래 보수적이지 않나.

- 시어머니와 화해하고 남편과는 다시 합친 건가?

이혼 후에도 아이에게 상처를 주어선 안 되니까 시어머니와의 관계를 조금씩 좁히고 있었다. 아이가 있으니까 무 자르듯 단절되진 않더라. 그러다 시어머니께서 올 해 6월 초에 폐암 말기 판정을 받게 되셨다. 아산병원에서 석달까지 밖에 살지 못한다고 하는데 어떻게 하나. 옆에서 간호해드리는데 시어머니께서 그러셨다. 자기가 오해했다고, 미안하다고 하셨다. 지난 823일 하늘나라로 가셨다. 내가 맏며느리다. 내가 시집 살림 이어 맡는 걸 보고 안심하고 좋은 마음으로 가셨다. 남편은 뭐 내가 간첩이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이다. 내가 밤마다 모르스 부호를 날리는 것도 아니고(웃음). 시어머니가 몹시 걱정하니까 잠시 그런 결정을 했던 것이다. 지금은 잘 지낸다.

- 다음에 이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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