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에게 당당한 엄마가 되고 싶었다” 2

“아들에게 당당한 엄마가 되고 싶었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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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첩이란 단어 무섭지 않나? 특히 탈북자에겐 더욱 그럴 것 같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민주주의를 말하는 데 빨갱이소리를 듣는다. 탈북자가 민주시민으로서 진보적인 의견을 말하면 간첩이라 한다. 어처구니없는 상황이다. 거듭 말하지만, 탈북자들에겐 표현의 자유가 없다고 봐야 한다. ‘탈북자는 대한민국이 건국되는 데에 벽돌 한 장 기여한 것 없으니 잔말 말고 조용히 살아가라는 논리다. 북한에서 살 때 김일성 원수님께서 항일무장투쟁으로 나라를 찾아주시고 베푸시는 커다란 은덕 속에 우리가 살아왔으니 굶어 죽어도 (고난의 행군) 참아야 한다.는 논리와 같다. 표현의 자유를 막는 프레임이 남과 북이 똑같다. 다른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는다. ‘이곳’(남한)이 그렇게 싫으면 저곳’(북한)으로 다시 돌아가라는 식이다.



- ‘유우성 간첩 조작사건이 언론에 보도되었을 때 탈북자 사회가 굉장히 위축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금은 모든 것이 조작이었다는 게 만천하에 드러났다. 그럼에도 70곳 넘는 탈북자 단체 중 어느 한 곳도 이를 규탄하는 성명서 하나 내지 않고 있는 게 안타깝다.

탈북자라면 어제의 유우성이 오늘의 내가 될 수 있기에 누구 하나 감히 나서지 못한다. 나도 블랙리스트’(감시 대상 명단)에 있었기에 대통령이 참석하는 공군 에어쇼에 거부당한 것 아닌가. 친구들이 말하더라. 조작 대상이 유우성이 아니라 내가 될 수도 있었다고. 천만다행으로 나는 중국을단 한번도다녀온기록이 없어서 조작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탈북자들은 늘 이런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북한에 가족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믿을 만한 사람끼리 대화할 때는 다양한 의견을 내지만, 사회적 발언은 극히 꺼린다. 전체주의 저리 가라 보수적인 주장에 목소리를 모으고, 북한으로 날아가지도 않을 삐라를 보내는 행동들은 모두 생존과 연관된 일이다. 그래도 예전엔(활발히 활동할 당시) 대한민국이 민주사회가 되기까지 많은 희생이 있었듯, 우리 탈북자들도 숨어 있지 말고 민주사회에 다양한 목소리를 보태자고 주변 사람들을 설득했었다.


돌아온 결과는빨갱이’ ‘간첩’ ‘종북좌파라는 딱지였다.

더 이상 무엇을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긴 한숨)

- 안동에서의 삶은 어떤가?

시어머님이 맡아서 하던 살림을 도맡게 되었다. 이것 저것 정리할 일들이 많았다. 이제 겨우 숨을 돌리고 있다. 시아버지께서 결혼 전 교통사고(결혼전 12년째였음)를 당하셔서 하반신마비 20년째이시라 대소변 받아내고 있고, 시숙모가 1, 사촌시동생이 2급 정신지체장애인이다. 주변의 도움의 손길 없이는 하루도 버틸 수 없는 분들이다. 시설로 보내라는 사람도 있는데 자유롭게 살던 분들을 격리시키고 싶지 않다. 그분들 챙겨드리고 근처에 사는 친정 아버님 병원 갈 때에도 챙겨드리고 가족복지하면서 살고 있다.(웃음)

- 어떻게 안동(경상도 시골로 바꾸어 주셨음 좋겠어요.)에 터를 잡게 되었나?

아버지가 먼저 탈북해 경상도 시골에 정착했다. 하나원(탈북자 정착교육시설)에서 제비를 뽑는다. 아버지가 뽑은 거주지는 부산이었고, 같이 교육받던 20대 청년이 경상도를 뽑은 모양이다. 그 청년이 시골을 뽑았다며 절망하는 걸 보고 아버지는 자기가 뽑은 종이와 바꿔줬다고 하더라. 나중에 한국에 온 나는 아버지가 살던 경상도 시골에 자동적으로 배정을 받았다. 여기에서 삼년동안 식당에서 일도 하고, 국비학원(세무회계, 컴퓨터)에도 다니고, 중매로 신랑을 만나 결혼했다. 아들을 낳고 뒤늦게 서울에 있는 대학에 진학할 결심을 하게 되면서, 친정어머니와 인천에서 아이와 함께 살았다. 지금은 다시 촌(경상도)으로 들어와 터전을 가꾸고 있다.


- 촌에 아이도 함께 데려왔다. 교육에 관한 고민은 없었나?

6.4 지방선거 끝나고 7월에 같이 내려왔다. 시골 사람들이 신기해한다. 다들 도시로 나가지 못해 안달인데 반대로 왜 들어왔느냐고. 아들이 이제 일곱 살이다. 인천에서 살 때는 11영구임대아파트에 살았다. 좁은데다 층간소음 때문에 뛸 수도 없었는데 여기는 마당이 있으니까 마음껏 뛰어다닐 수 있어 좋아한다. 아이 정서상 좋은 것 같다. 멍멍이, 고양이도 안아주고, 감도 따러 다닌다. 자전거를 사줬더니 마을을 세 바퀴나 돌더라. 아파트 살 때는 슈퍼에 붙어서 종일 뭐 사 먹고 그랬는데, 여긴 30분은 걸어서 나가야 한다. 처음엔 냉장고 열었다 닫았다 하더니, 지금은 잘 적응한 것 같다. 햄버거, 치킨 이런 것은 한 달에 한 번꼴로 도심 나와서 사주고 한다.

- ‘아들에게 당당한 엄마가 되고 싶다고 했다. 초야에 묻힌 삶을 선택한 것도 그래서인가?


실명으로 마지막으로 쓴 글이 <창작과 비평>에 실은 표현의 자유와 관련한 내용이었다. 탈북자가 표현의 자유를 누리면서 살아야 하는 대가가, 삐딱한 사람이라는 낙인과 사회 부적응자라는 딱지였다. 대한민국의 민주시민으로, 아들에게 당당한 엄마가 되고 싶었는데, 그 반대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통일이라는 대의도 좋지만, 손에 닿는 주변인들에게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려고 한다. 촌에서 내가 만나는 분들은 통일? 그거 구워먹는 거야?’ 하는 분들이다.(웃음) 지금 마음이 참 편하다. 집에서 키워오던 고양이, , 닭들도 다 나만 쳐다본다. 나를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곳에서 살고 있다.

- 통일을 위해서 탈북자들의 역할이 절실하다.


통일? 그거 구워먹는 건가, 튀겨먹는 건가? 농담이다. 탈북자들 대다수는 주어진 현실에 맞게 조용히 정말 열심히 산다. 몇몇 잘났다는(북한에서 뭐 했네, 뭐 했네 이런 사람들)? 사람들이 이미지를 망치는 거지. 탈북자가 통일의 밑거름이니, 북한과의 다리 역할을 해야 한다느니 여러 거창한 담론이 힘이 되었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은 대다수 탈북자들이 탈북자신분을 숨긴다. 강원도가 고향인 척하거나, 조선족인 척한다. 탈북자임을 밝혀서 이익을 보거나 도움 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시도 때도 없이 터지는 간첩사건 때문에 오히려 잠재적인 간첩이 아닐까 하는 불편한 시선까지 감수해야 하는 것은 큰 심리적 부담으로 다가온다. 나도 아들에게 피해를 줄까 봐 조용히 사는 길을 택했다.

- 다음에 이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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